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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판' 뒤흔들 철학이 필요

[시민운동 2.0]

 

자신의 이상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플라톤이 제시한 대책은 쿠데타 등의 급격한 변혁이 아니다. 내용상의 적절성을 떠나 그가 장황하게 제시한 해결책은 교육이라는 장기 프로젝트다. 교육학 분야에서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지만,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육론이다. 교육을 통해 기반을 다지지 않고 단순히 제도로만 강제되는 이상 세계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교육은 좀더 은밀한 곳을 향한 거대한 운동에 해당하며, 그 운동의 밑바닥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치밀한 철학과 사상적 고민이 흐르고 있다.

운동으로서의 교육에 주목한 플라톤의 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유럽 계몽사상기의 루소,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각종 운동적 성찰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현대의 운동 일반에 대한 암시도 막강하다. 현 상태의 변화를 꾀하는 운동들 대부분이 제도 변화를 목표로 하며 다양한 정책 제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또는 변화의 끝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의식의 장벽을 마주보며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의식의 한계라는 커다란 벽을 허물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기 위해 결국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요즘 우리 주변에서 운동이나 혁명의 상징으로 가장 큰 베스트셀러 시장을 형성한 것은 체 게바라일 것이다. 무언가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보며 변화에 대한 작은 열정이라도 간직해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물이 뻗어 나온 혁명이나 운동의 뿌리에 대한 탐구는 별로 없다. 단지 우상화된 한 인물만이 서 있을 뿐이다.

그 자신이 곧 국가였던 왕의 목을 치며 근대 유럽의 탄생을 알린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부회의나 미라보,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등의 전환기적 사건이나 인물이 혁명에 대한 인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 실존주의 문학가 까뮈는 ‘반항적 인간’에서 혁명기 정치가였던 생쥐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아마도 피고(루이 16세)를 죽게 하는 명분이 될 원리를 결정하는 일, 그것은 바로 피고를 심판하는 사회가 영위되어갈 토대의 원리를 결정하는 일이다.” 왕의 목을 친 것은 소수 혁명가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 그리고 교육을 통화 사회적 확산이 혁명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인류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이며, 그것은 곧 낡은 관습과 문화가 갖는 내재적 모순에 대한 반발이 불거져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들불같이 일어난 투쟁의 역사다. 전쟁을 비롯한 폭력의 힘이 변화의 원동력일 듯싶지만, 항상 변화의 주도권을 잡은 건 새로운 시대의 철학과 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던 세력이었다. 유혈이란 무혈 투쟁의 실패를 증명할 뿐이다. 권력의 나침반에 다수의 의식을 맞춰놓는 것이 최고의 승리 전략이며, 유능한 지배전략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운동은 좋은 철학과 사상을 바탕에 깐 좋은 교육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운동의 형편은 어떨까. ‘판’에 대한 조망과 전망을 즐기는 정책분석은 많아도, ‘판’의 근본을 헤집고 뒤집는 노력은 보기 힘들다. 운동으로서의 교육이 활발히 이뤄지지도 않는다. 단지 단체나 개인의 신념을 홍보하거나 주입하려는 형태의 교육만 있을 뿐, 신념 그 자체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좀더 근본적인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단지 기능적으로 파편화된 사회의 요구에 맞춰 다분히 기능적이며 형식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인간미를 찾아보기도 힘들고 별다른 감흥도 주지 않는다. 일반 시민들의 시선과 평가가 다를 이유가 없다. 고민하지 않는 운동에서 기존의 관습과 문화의 완고한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나올 리 없다.  

2차 대전 후, 주로 미국에서 발전한 실용주의적 기능론의 폐해를 의식적으로 시정하지 않는 한 이런 철학 없는 운동과 철학 없는 사회가 변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회를 각 기능별로 분리하고 관리와 통제를 통해 실용성을 극대화하려는 미국식 사회과학 방법론이 대학 교육은 물론 운동의 성격과 지향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의 기반을 이룰 철학과 사상이 낡은 관념으로만 취급받고 있으니 감동적인 교육이 나올 리 없다. 운동이 변화의 원동력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근본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최철규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

 

제22호 19면 2007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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