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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민족&평화

평양은 다시 나를 오라 하네

6.15민족통일대축전 참가기[1]

 

#둘째 날

오전에 인민문화궁전에서 민족 단합대회를 하고 오후엔 대동강유람선을 타기로 한날이다. 모두들 민족단합대회는 간단하게 치룰 것을 예상하고 대동강변을 돌아본다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이날 대회가 결렬되어 남측, 평양시민, 해외 측 참가자들이 10시간이상 한곳에 오도 가도 못하게 묶이게 될 줄 아침엔 미처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한나라당 주석단 참석 변수가 생긴 것인데, 참가에 대한 논란은 있었으나 서로 양해 아래 그 전날 개막식에서도 주석단에 포함되었으므로 그날 다시 문제가 불거질 줄 남측 집행부는 예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오전 10시에 대회장에 도착한 남측 참가자들은 오전 8시부터 미리 와서 착석하고 있던 2천400여명의 평양시민으로부터 박수와 함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들어갔다. 착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동대표단이 주석단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에 맞추어 박수를 쳐댔다. 그런데 갑자기 양측 대표단이 들어오다 말고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배치문제로 갈등이 생긴 것이다. 답답하게 한두 시간이 흐른 후 집행부로부터 남측대표 300명은 대회장에서 퇴장하라는 전달사항이 왔다.

대표단이 퇴장하여 모인 1층 로비에서 백낙청 대표는 참가자 전원을 모아놓고 민족대회가 결렬되었다는 결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흥분한 군중은 곧 바로 무질서를 드러냈다. 북측 안내원들이 수십 명 둘러싼 가운데 서로간에 고성이 오갔고  일부는 대회는 반드시 성사되어야한다며 도로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등 난맥상을 보이게 되었다. 민변 백승헌 회장이 남북 집행부 협의는 진행하되 나머지 참가자들을 식당으로 옮겨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남측 일부에서는 ‘지금 밥이 문제냐’며 자리를 지킬 것을 고집해 격한 흥분 속에서 묻혀버렸다. 이번 방북에 국회의원들이 열린우리당 7명, 한나라당 3명, 민주노동당 1명 등 10여명이 참가했지만 북측은 행사 전부터 한나라당 의원들의 방북을 탐탁치 않아했고 이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는 내용이 비로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대체제와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온종일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미처 예견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나 자신의 판단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위해 남측 대표자회의를 2차례 하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통일운동을 해오던 통일연대와 범민련 그룹 등은 북측이 어떤 요구를 하든 행사를 진행해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반해 시민단체, 여성, 종단 등의 입장은(한나라당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측이 어느 특정한 그룹을 문제 삼아 행사를 지연시키거나 거부할 때 남측은 이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위원회 규약에 따른 원칙을 유지해야 하고, 그 결과 행사가 파행에 이른다 해도 할 수 없으며 이를 감수해야한다는 것이다. 2달 후 2007년 8·15 공동 행사로 북측 대표단을 맞아는 부산 분들은 행사가 파행으로 이를까봐 고민과 우려가 깊었다.

6.15민족통일대축전 행사가 파행으로 얼룩진 가운데 남측대표단들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대회개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양측 주장 모두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쉽지 않은 문제였고 이러한 것이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부 그룹은 후자의 입장인 상임대표의 원칙을 존중하는 편이었고 일부에서는 ‘왜 한나라당이 참여 했냐’며 심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백낙청 상임공동대표는 매우 어려워했지만 결국 남북의 정당, 시민단체, 사회단체가 연대해서 만들어낸  6·15선언공동실천위원회의 규약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고 이후 일부 양보했다. 내가 속한 시민단체 그룹은 상임공동대표에 힘을 보탰다. 이런 와중에서 일부그룹은 권위주의적인 행사진행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주석단(단상)을 해체하자는 주장을 포함해 갈등국면에서 자신들이 아는 정보를 종합하고 최선을 다해 진솔하고 진지하게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일부는 자신들의 의견을 폭력적으로 개진하려고 하기도 했다. 대표자들이 퇴장한 오후 1시 이후부터 그날 밤까지 수많은 회의를 거쳤지만 결국 결렬되고 남측, 북측, 해외 측 모두 지친상태에서 저녁 8시 무렵 해산하게 되었다.

하루 온 종일 6월의 무더위 속에서 10시간을 인민문화궁전 계단에 삼삼오오 주저앉아 대회개최소식을 기다렸지만 끝내 기다리던 소식은 접하지 못한 것이다. 그날 평양시민 2천400명은 12시간동안 오도 가도 못하고 남측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행사장인 강당 내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엄마들이 아이를 탁아소에서 찾아가지 못해 많은 혼란이 뒤따랐다고 했다. 그 다음날도 북측은 민족단합대회가 열릴지도 모른다며 기약 없이 오전 8시부터 같은 장소에 평양시민을 또 다시 대기 시켰다고 한다.

세 번째 날 역시 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방북단에 시범을 보이기 위해 소년문화궁전에서 모인 학생들도 이틀 동안 늦게까지 대기했다고했다. 그리고 이 모두는 남측의 잘못으로 전달되어 해외측 참가자도 남측에게 원망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민족단합대회가 결렬된 그날 북측은 점심식사를 제공하지 않은 채 오후 4시경 개인당 도너츠 빵 하나와 생수 한 병을 지급했다. 북측은 남에서, 해외에서 초청한 손님을 10시간동안 물과 빵 한 조각만 나누어주었을 뿐 거의 방치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이 부분에 대한 북측의 논리나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결국 이날 겪은 일들은 ‘행사파행, 기자 10시간 억류’이라는 제목으로 남측 중앙일간지 1면 톱기사를 장식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보통 때는 상대방 연설문 문귀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1~2시간을 끌기도 했다고 하고, 어떤 때는 행사가 지연되어서 저녁식사를 새벽 1시에 하기도 했다고 한다. 모두들 그 정도 기다림에는 이력이 난 상태였지만 이번 경우는 모두들 ‘해도 너무 한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한편에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토요일 북경행 비행기를 통해 조기 귀국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셋째 날

민족단합대회가 열린다는 보장도 없이 혹시나 하는 기대반 우울한 마음반을 담고 남측 참가자들은 만경대와 평양음악대학을 관람했다. 오후엔 뿔뿔이 흩어져 이제나 저제나 대회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집행부소식을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결국 셋째 날과 둘째 날 오후 참관하기로 한 개선문, 주체사상탑, 대동강유람선승선은 모두 취소되고 최종적으로 양측은 마지막 날 오전, 귀국 전에 모든 행사를 일사천리로 해결한다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이 결정에 따른 불만도 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였고 예상된 결과였다. 억지든 뭐든 모든 것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하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나오는 베테랑협상가로 이루어졌다는 북측과 이러한 북측에 대해 화해와 포용, 아량과 여유를 가진 남측 간에는 아무래도 간극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게임의 결과도 이미 정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좀 더 고민해보아야겠고 아직 행사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남아있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니 비록 남측집행부가 협상에는 초보수준이나 순수한 열정과 헌신성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핵문제등 냉온탕을 거듭하는 당국과는 별도로 7년 동안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명맥을 이어오는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6월 17일

행사 마지막 날인 일요일, 우여곡절 끝에 예정된 출국시간을 늦추며 태권도전당에서 민족단합대회와 폐막식을 연달아 개최하였다. 태권도 전당에 가는 길, 일요일이라 그런지 화창한 거리에는 가족단위 도보객들이 많았다. 백낙청 상임대표는 민족단합대회 대회사를 통해 ‘민족대회 행사의 지연과 파행에 사과하다’ 고 밝혔다 북측 공동위원장도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다. 남측, 북측, 해외 측 공동대표 모두 연설문을 통해 ‘민족’을 강조했다.

우여곡절 끝에 막상 두 행사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치르다 보니 단상 위 주석단에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이길래 수천명 사람을 이틀간 고통에 넣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행사를 급하게 마친 후 비행기시간에 맞추기 위해 ‘어서 버스에 타라’는 주최 측 재촉을 받으며 행사장 밖으로 나오니 환송인파가 몰려 마치 거대한 축제장과 이별의 장이 합쳐진 것 같았다. 결국 북녘 땅에 동포를 두고 가는 이 순간의 ‘짠한’ 마음 때문에 또 다시 북녘 땅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3시간 정도 지연된 귀국길, 순안 공항을 가기위해 환송인파를 뒤로하고 버스를 달렸다. 대로변을 보니 북의 식량난을 반영하듯이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숲마다 심한 그늘을 제외하고는 가지런히 밭을 일궈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하천변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재정난 때문에 모두들 평양근교만 나가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궁핍하다고 했다. 기술발전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북측에서의 대부분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숙박한 평양의 2개의 특급호텔중 하나인 양각도 호텔의 체크인과 체크아웃도 노트에 볼펜으로 적어 넣은 식이었으므로 귀국 때 호텔에 카드 키를 반납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확한 통계는 나로서는 알수가 없고, 통계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북의 국민소득이 남의 30분의 1규모에 해당한다니 단순비교를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꾸 비교하게 되었다.

행사를 마치고 순안 비행장으로 향하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들이 생존하고 남북이 공존하는 길은 무엇일까? 그 모든 의문과 우려를 뒤로하고 인천행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니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지며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남북간은 여전히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큰 틀안에서 간극은 말 그대로 틈새일 뿐이다. 식사도중 기념 촬영을 했다.


일요일, 평양에서 오후 1시 출발해서 불과 3~4시간 만에 도착한 집에서 오후 5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북측에 있는 사이 비전향 장기수로 인도적 차원에서 북으로 보내드린 이인모 씨 사망했다고 한다. 다음날은 국회의원들이 맞추어 입은 양복이 다시 뉴스를 장식했다. 개성공단을 비롯해 남북이 경제협력을 하는 마당에 국회의원들 아니라 그 누구라도 본인이 원하면 100달러짜리 양복을 맞춰 입을 수 있는 것이지 그 일이 새삼 무슨 문제란 말인가? 북 문제에 관한한 남측끼리도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횡행했다.

남북문제를 포함해서 소위 남남갈등이 심각한 것처럼 말하지만 솔직히 지나놓고 보니 그 당시만큼 심각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나와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합의해나가고 논의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누구도 이탈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서로 공유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 끝으로 이번 행사에 참가하여 깊은 인상을 안고 희노애락을 함께한 부문별, 각 지역 참가자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굽이굽이 어려움을 참아낸 집행부에게 초보 참가자로서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김정명신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공동회장

 

제10호 7면 2007년 7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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