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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이재영ㅣ독설의 역설

알파걸 아닌 비정규직 여성을 보라

이재영_독설의 역설 [18]

 

“‘알파 걸(alpha girl)’이란 모든 면에서 또래의 남자들보다 월등한 여학생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요즘 남녀공학 중고교에서는 공부 잘 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남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부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에서 여학생들이 활개를 치는 바람에 남학생들은 주눅이 들어 지낸다고 한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약진은 실로 눈부시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금녀(禁女)의 벽은 무너졌다. 남녀차별이란 말이 슬금슬금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나라가 주관하는 모든 시험에서 상위권은 여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확실히 달라졌다. 불과 얼마 사이에 남자와 여자의 처지가 뒤바뀌었다.

…똑똑한 여자들의 출현은 지구가 그들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는 2000년대는 ‘알파 맘(alpha mom)’의 시대라고 보도했다. 가족, 직업, 개인적 삶을 조화시키며 어머니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여성들을 알파 맘으로 지칭한 것이다.

인류에게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다. …알파 걸의 알파 맘 편입이 완료되면 지구촌에는 신모계사회가 펼쳐질 것이다.”(김택근 논설위원, ‘알파 걸, 알파 맘’, 경향신문, 8. 30)

각종 자격시험에서 여성이 과반을 점하고 일부 전문직종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에 띄는 현상은 어느 모로 보나 긍정적이다. 하지만 남녀차별이 사라진다거나 남녀의 지위가 역전되고 있다는 윗글의 진단은 지나친 과장이다.

알파걸 신드롬 뒤에 숨겨진 더욱 중요한 사실은 당연하게도 여성 비정규직 문제다. 외무고시 합격자의 67.7%가 여성인 것처럼 또는 그것과 정반대로 여성 노동자의 67.6%가 비정규직이다. 외무고시에 합격한 여성은 21명이고, 비정규 여성 노동자는 435만 명이다.

이들은 ‘가족, 직업, 개인적 삶을 조화시키는 알파 맘’이 아니라 직장에서 천대받고 가사노동에 허덕이고 이름도 잃어버린 여자노비다. 조선 시대에는 여자노비에게 30일의 산전휴가와 100일의 산후휴가가 주어졌지만 지금은 비정규 여성 노동자의 2/3가 90일의 출산휴가를 사용하지 못한다.

알파걸 현상은 우리 사회 민주화와 양성평등화의 산물이며 동시에 극심한 계급 고착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서울대 입학생의 62.7%가 상위소득 20%의 집안에서 나오는 시대다.

과거 남성 알파맨들이 사회적 지배층으로 진출할 때는 우리 사회가 비교적 열려 있었고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현재의 알파걸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값비싼 사교육 혜택을 받은 자들 가운데 나오고 있다. 알파걸은 알파맨의 딸이다.

알파걸들은 우리 사회의 남성 권위주의를 불식시키고 문화적 다양성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일도 더러 있다. 전문관리직이나 법조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경우 이른바 ‘파렴치범’ 등으로 불리는 저소득층의 생계범죄나 일탈에 대해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남성 권위주의 사회의 보호주의적 태도는 사라지고 계급적 적대감이 한국 지배층의 세계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지배 남성보다는 나이 어린 지배 여성이 계급적으로 더 투철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알파걸들이 진정으로 여성적이려면 그들의 생래적 계급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10년 전 국민승리21 정책위원회와 당 내외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 공약 1번을 무엇으로 할지를 두고 꽤 심각한 갈등을 빚었었다. 당 정책위는 공공보육을 통한 여성 취업 확대를, 여성운동가들은 5급 이상 공무원직 등에서의 여성할당 30%를 1번으로 내걸자고 주장했었다. 그 때 무엇이 올바랐는지를 재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 무엇이 더 시급하고 절박하게 필요한지는 말할 수 있다.

여성할당제는 더욱 강화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상층 여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고위직 여성할당제를 넘어 가난한 집안 여성의 취학, 취업 등을 우대하는 하층 여성할당제를 도입해야 한다. 국공립대학의 진학, 학비 부과, 공공기관에의 취업과 승진 등에서 소득별 할당제와 차등제를 도입해야 한다. 대부분의 여성이 일하고 있는 판매서비스 업종에서의 임금 차별을 해소시키고 근로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이것이 알파걸들이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다.

소수자 우대 할당제의 정신에 따르자면, 위에서 당기는 것보다는 아래에서 미는 것이 더 올바르다. 그래서 알파걸의 성공에 환호하기보다는 비정규 여성의 서러운 삶에 대해 조용히 대화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파(Α)이기보다는 오메가(Ω)이고자 하지 않았던가.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

 

제19호 18면 2007년 9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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